퍼블릭 아트 PUBLIC ART 8월 호 : 비아, 예술가의 도시Ⅱ새 창 열림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하얀정찰병30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8-04 04:15본문
안녕하세요 홍티예술촌입니다. 오늘은 퍼블릭 아트 (PUBLIC ART) 8월 호 비아, 예술가의 도시Ⅱ 소개해 드립니다.특집고된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텁텁한 먼지가 낀 골목에는 절박하고도 광기 어린 아름다움이 모여들었다. 역설적이고도 자극적인 전후 과도기의 예술은 폭력과 참사를 넘고자 더욱 과감하고 찬란하게 거리를 비췄다. 서구권의 활발하고 낭만적인 예술 도시를 담았던 지난 5월호 특집에 이어, 이번엔 동양의 도시 속 섬세하고 끈끈한 예술사를 살핀다. 먼저 서울이다. 한국 전쟁 당시, 전쟁통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들의 밑거름을 시작으로 혼란한 시도들이 들끓던 명동의 화랑과 홍대 앞의 젊은 실험들, 정치적 시대상을 딛고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국내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그 시작을 연다.다음으로 경제 위기와 급격한 세계화 속에서도 강렬한 욕망을 무미건조하게 드러낸 도쿄의 “펀하고 쿨한 그리고 섹시”한 예술 실천에 대해 알아본다. 이어 산업화와 도시화로 수없이 재편되면서도 제도의 안팎으로 억세게 생존해 낸 상하이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이내 어떤 도시보다도 위태롭고 화려한, 격동의 세계 미술시장이 흐르는 홍콩의 항구를 지나, 마지막으로 영겁의 식민 지배와 계엄, 도시 개발의 정체성 혼란 속 뜨거운 열기를 삼킨 미지의 섬 끝자락, 타이베이의 연대기를 살핀다.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피어난 각 도시의 추억은 예술의 이름으로 비약적이고도 과격한 움직임을 쉬지 않고 만들었다. 아플수록 찬란하고 서글플수록 유쾌한 다섯 도시의 파동 한가운데를 거닐어 보자.● 기획 · 진행 편집부화가가 사랑한 도시, 서울● 조상인 『살아남은 그림들』 저자·『서울경제』 미술전문기자성북, 돈암동문패에는 ‘성북회화연구소’라 적었다. 행정구역으로는 돈암동이지만, 1946년 그 시절 혜화문 밖 ‘성북’은 타국에서 돌아오고, 타지에서 서울로 들어온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단단함의 이름이었다. 처음부터 학교나 학원을 생각하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이쾌대는 그저 해방의 감격을 보여주는 ‘군상’을 그리고 싶었고, 어른 키보다 더 큰 폭의 캔버스를 놓고 작업할 공간을 찾다 일이 커졌다. 꾸준히 드나들며 그림 공부하던 학생 중 하나가 평남 맹산에서 온 열일곱 살 김창열이었다. 스승은 기법이 아니라 태도를 가르쳤다. 훗날 김창열은 성실과 끈기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50년간 물방울만을 그린 집요함의 내력이다.서울은 화가들을 불러모았다. 김환기는 전남 신안 안좌도에서 왔다. 이중섭은 평남 평원, 유영국은 강원도에서 경북이 된 울진 출신이며, 장욱진의 고향은 지금의 세종시인 충남 연기군이다. 서울은 화가를 받아주는 도시였다. 36년의 일제 강점기를 끝내고 이제 막 해방을 맞은 땅에서 화가들은 미술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꿈꿨다. 1947년 결성된 ‘신사실파’는 이듬해 12월, 지금의 종로 자리에 있던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김환기·유영국·이규상 등이 주축을 이룬 창립전을 열고 우리 방식의 조형언어를 펼치겠노라 선언했다. 두 번째 전시에 장욱진이 합류했다.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피난지 화가들이 1953년 부산 광복동에서 연 전시가 마지막이 됐지만, 이 시기의 활동들은 훗날 도래할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 서울의 밑거름이 됐다.화가이자 평론가였던 김용준의 성북동 집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수향산방’이라 이름 붙이고 살던 김환기는 전쟁통에 서울대에서 홍익대로 자리를 옮겼다. 홍익대 동양화 전공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한 박서보는 전쟁 중에 갑작스레 아버지를 여의었고, 스승들을 잃었다. 이후 서양화로 전공을 바꿨다. 미군정에 반발하는 시위로 서울대에서 제적된 윤형근은 김환기가 있는 홍익대로 편입했다. 전쟁의 후유증처럼 전 세계가 실존주의를 앓았고, 젊은 화가들은 무너진 형태 속에 앵포르멜(informel)로 빠져들었다. 6·25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화가들에게 실존은 수입된 유행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였다.덕수궁 돌담길에서 명동까지지금은 운치 있는 산책길이 된 덕수궁 돌담 바깥벽에 그림이 내걸렸다. 시절 모르는 고리타분한 옛날식 그림에 점수를 주는, 낡아빠진 국전(國展)에 반기를 든 서울대와 홍익대 출신 청년 열두 명이 단행한 ‘벽전(壁展)’이다. 1960년 10월, 담장 안에서는 국전이 열리고 있었다. 스물넷의 윤명로는 문명 이전의 인간을 찾겠다며 어두운 색과 두터운 마티에르로 ‘벽’과 ‘원죄’를 그렸다. 당시 신문은 이들을 ‘전후파(戰後派)’라 불렀다.그 한복판에 새로움을 찾아 이글거리던 박서보가 있었다. ‘벽전’ 직후인 1961년 ‘파리 비엔날레(Biennale de Paris)’에 초청받아 프랑스를 방문했다가, 예기치 못한 상황들로 수개월간 현지에 머무르며 최첨단의 유럽미술을 흡수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앵포르멜은 이미 포화상태”라 선언했다. 반(反)국전을 이끌던 박서보는 반(反)예술을 선도했다. 화가의 고민은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회의적 질문에 가닿았다. 그리지 않고, 의도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마침내 박서보식 ‘묘법’에 이르렀다. 도교적 동양사상, 한지의 물성까지 얹으며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서양미술 어디에도 없는 고유의 그림이 탄생했다. 1970년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이어지는 그 시기, ‘단색화’의 황금기가 펼쳐진다.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우환은 한국에 올 적마다 어김없이 박서보를 찾아가곤 했다. 그럴 때면 집주인은 빠듯한 살림에도 친구를 위해 조기를 구워내곤 했다. 이우환은 화가인 동시에 미학자였고, 그가 1969년에 쓴 평론은 일본 모노하(物派)의 이론이 됐다. 만들지 말고, 사물을 사물로 두고 만나라는 내용이었다. 1972년 8월 서울에 온 이우환은 명동에서 안국동으로 옮긴 ‘명동화랑’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를 마친 뒤에도 이우환은 또 박서보의 작업실을 찾았고, 이듬해 박서보의 일본 무라마츠 화랑 전시를 도모했다. 오늘날 단색화의 시작 지점으로 꼽히는 1975년 도쿄 긴자 도쿄화랑의 ;전이 이들의 의기투합과 노력에서 탄생했다.명동화랑 주인 김문호는 팔리지 않는 그림만 골라 거는 사람이었다. ‘벽지 같다’는 소리를 듣던 이우환, 윤형근, 박서보 전시를 열었다. 형편이 어려운 작가들의 생활비와 제작비를 대며, 권진규를 후원한 것도 그였다. 화랑은 1975년 문을 닫았다. 1973년 그곳에서 서른 살 이강소가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단골 선술집의 탁자와 의자를 통째로 사들여 화랑에 옮겨 놓고 일주일간 술집을 운영한, ‘소멸’을 주제로 한 전시였다. 작품은 관람객이 앉는 순간 완성되고 일어서면 사라졌다. 남들이 캔버스 앞에서 벗어날 고민을 할 때, 캔버스 올을 풀어보던 이강소가 아예 캔버스 바깥으로 나간 셈이다. 훗날 ‘파리 비엔날레’에서는 닭을 말뚝에 묶고 바닥에 흰가루를 뿌려 사흘 동안 닭이 걸어다닌 발자국만 남겼다.그해 윤형근도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숙명여고 미술교사였던 그는 중앙정보부장이 뒤를 봐준 부정 입학을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하늘의 청(靑)과 땅의 다(茶) 두 색만 남았다. 화가는 이를 천지문(天地門)이라 불렀다. 1974년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가 뉴욕에서 세상을 뜨자 남은 색마저 어두워졌다. 침묵의 미학을 몸소 실천했다.단색화는 화가들 제각각의 고민이 형성한 한국적 공통분모라 할 수 있다. 하종현은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만들었다. 그는 캔버스에 철조망을 붙였고, 신문지 크기의 백지를 층층이 쌓았다. 1974년 하종현은 앞에서 그리는 그림 제작방식을 뒤집었다. 성긴 마대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밀어내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배압법으로 ‘접합’ 연작을 시작했다. 정상화는 캔버스를 틀에서 벗겼다. 반듯하게 펴야 할 캔버스를 접었다 펴길 거듭했다. 고령토를 바른 캔버스가 마르면 접은 선 따라 생긴 자리를 뜯어낸 뒤 물감으로 채우는 방식을 반복했다. 조수 하나 없이, 작품 한 점에 1년이 걸리기도 했다. 이들은 무엇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1946년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목탄그림을 그리다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간 김창열은 마구간 작업실에서 스스로를 단련했고, 마침내 피·땀·눈물을 걸러낸 듯 영롱한 물방울을 완성했다. 김창열은 1976년 인사동 현대화랑에서 물방울을 선보였다. 국내 첫 전시였다. 해방 직후 첫 삽을 뜬 미술운동의 토대 위에 30년을 관통한 한국 현대미술의 모더니즘 황금기가 펼쳐졌다.세계화와 홍대 앞 신세대많은 미술인들이 서울로 모여들었지만, 정작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드물었다. 사대문 안에서 태어난 진짜 서울 토박이로 백남준이 있다. 일찍이 피아노와 영어를 배운 백남준은 1949년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고 일본에서 현대음악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는 독일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미국에서 이름을 날린 글로벌 유목민이었다.1984년 6월 22일 저녁, 백남준이 김포공항 입국장에 나타났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 불리는 세계적 작가가 되어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다섯 살부터 살던 창신동의 아흔아홉 칸 큰 대문집은 1950년대에 헐리고 없었으니, 서울에 올 때면 늘 호텔에 머물렀다. “예술은 사기, 그것도 고등사기”라는 귀국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은 농담이 아니라 판을 짤 줄 아는 사람의 말이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독일관 대표로 참가해 ‘황금사자상’을 받은 그는 그 상을 지렛대 삼아 세건의 빅프로젝트를 성사시키며 한국에 글로벌 미술의 현황을 소개하고 한국미술이 세계 무대로 진출할 기반을 마련했다.백남준은 그해 7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을 성사시켰다. 사비와 인맥을 쏟아부었고, 미국의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가 국경을 넘은 최초의 사례가 됐다. 한 달 남짓한 과천 전시에 15만 명이 다녀갔다. 1995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 공간인 자르디니에 26번째 마지막 국가관인 한국관이 개관했고,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됐다. 백남준은 언론을 통해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강한 이빨을 주고 싶다”고 그 취지를 내비쳤다. 오늘날 인터넷에 해당하는 ‘전자 초고속도로’를 상상하던 그가 서울과 세계 미술계가 직통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닦아준 셈이다.백남준이 한국을 자주 방문하던 그 무렵, 1987년 홍대 앞에서는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7명의 젊은이들이 ‘뮤지엄’이라는 소그룹을 만들었다. 이불, 최정화, 고낙범, 홍성민, 정승(샌정), 노경애, 명혜경이 그 주인공이다. 미술관을 조롱하려고 미술관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발칙한 청년들이었다. 단색화는 화랑 안에서 침묵 속에 여백을 지켰지만, 광장에는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민중미술은 걸개그림으로 이야기하던 1987년 6월 항쟁의 시기다. 그 팽팽한 양극 사이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것이 이들의 태도였다.이불은 1964년 군사정권하에서 반체제 활동을 하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쫓기며 옮겨 다니는 유년을 보냈다. 그에게 집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떠나는 곳이었다. 홍대 조소과에서 배운 돌과 철은 무겁고 옮기기 어렵다는 이유로 떨쳐버렸다. 대신 몸에 입을 수 있는 조각을 만들었다. 1990년 촉수 달린 물컹한 덩어리를 뒤집어쓰고 서울과 도쿄의 거리를 열이틀 동안 걸었다.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시퀸을 박은 생선 아흔여덟 마리를 걸었다가 부패하는 냄새 탓에 철거당했다.그 소동이 오히려 그를 세계에 알렸다. 이듬해 발표한 연작 ‘사이보그’는 머리가 없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실리콘 신체였는데, 몸의 진화로서 페미니즘까지 아우르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총감독을 맡은 1999년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한국관과 본전시에 동시에 서며 ‘특별상’을 수상했다.같은 1999년 베니스의 아르세날레에는 김수자의 파란 트럭이 서 있었다. 1997년 가을 색색의 보따리를 산처럼 싣고 서울을 떠나 열하루 동안 2,727km를 달린 트럭이다.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 다니던 유년의 마을들을 되짚는 길이었고, 짐 꼭대기에는 작가 자신이 앉아 있었다. 보따리는 이불보이고 이불보는 결국 집이다. 집을 싸서 등에 지고 웨스턴돔 입주청소 떠나는 일은 이 민족이 지난 세기 내내 해온 일이기도 했다. 2002년 김수자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대됐다.최정화는 미술관 대신 공사 현장으로 갔다. 1987년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자마자 화가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회사에 들어가 재료를 배웠다. 1990년대 초 조화와 생화를 같게 여기는 아주머니들, 어느 집에나 있던 플라스틱 소쿠리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 목록은 그대로 세간 목록이 됐다. 밥공기를 쌓고 빨래판을 쌓고 병뚜껑 30만 개를 깔았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에 세운 지름 9m의 ;는 전국에서 쓰임을 다한 그릇 7,000여 개를 모아 뭉친 것이었다.집 그리고 다시 서울부산 태생의 박철호는 1995년 박이소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왔다. 1982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이름을 버리고 ‘박모’, 누구여도 좋을 아무개라는 예명을 썼다. 브루클린에 대안공간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열어 이민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그였다. 서울로 온 그의 이름 박이소(異素)는 낯설고 소박하다는 뜻을 품고 있다.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가 된 그는 2010년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이 솟을 마천루 열 개를, 손대면 흔들릴 가느다란 뼈대로 세워 보였다. 쟁쟁한 국가관들의 경쟁 사이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놓은 것이다. 이듬해 4월 청담동 작업실에서 심장이 멎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을 관통하는 그의 10여 년 서울 생활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황금기와 겹친다.2001년 광진구 광장동, 정연두가 아파트 복도를 돌며 무료로 가족사진을 찍어준다는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서른두 집이 문을 열어 주었다. 찍은 사진 32장을 나란히 걸자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살구색 벽지, 마루바닥, 하나같이 둥근 조명. 배경이 전부 같다는 사실을. 작품 ;(2007)는 백남준 이후 처음으로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된 한국 작가의 비디오가 됐다.2006년 양혜규는 인천 사동 30번지, 외할머니가 살던 폐가에 들어가 형광등을 켜고 선풍기를 돌렸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골목의 빈집이 전시장이 된 것이다. 그해 1월 백남준이 마이애미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끝내 창신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도호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화로 현대적 추상미술을 이뤄낸 아버지 서세옥이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를 본떠 지은 성북동 한옥에서 자랐다. 일제 강점기 때 헐린 궁에서 나온 춘양목으로 지은 집이었다. 한옥을 해체해 옮겨 다시 짓는다는 뜻으로 목수들이 “집을 걷는다”고 하는 말이 아이의 귀에는 집이 걸어 다닌다는 말로 들렸나 보다.미국 유학길에 오른 서도호는 뉴욕의 아파트 생활에서 서울 성북동의 한옥집을 떠올렸다. 집을 데려올 수 있다면, 집이 걸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다면! 199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옥색 은조사로 성북동 한옥을 실물 크기로 꿰매 허공에 매달았다. 접으면 가방에 들어가는 집이었다. 목수의 말이 그렇게 실현됐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기념작 ;까지, 그의 집은 지금도 세계를 돌고 있다.1946년 문패가 걸렸던 혜화문 밖 성북과 서도호가 자란 성북동 한옥은 같은 언덕 자락이다. 지난 80년 동안 이 도시의 미술은 식민지에서 전쟁으로, 전쟁에서 산업화로, 산업화에서 세계로 옮겨 다니며 여러 번 집을 잃었다. 그때마다 목탄으로, 안료로, 전파로, 실로 화가들은 다시 집을 지었다. 황금시대란 걸작이 쏟아진 시대가 아니라 아직 답이 정해지지 않아 모두가 제 질문을 들고 서 있던 시대다. 서울에 그런 시간이 있었다. PA글쓴이 조상인은 미술사와 미술경영을 전공한 후 『서울경제』에서 19년째 미술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는 현장 전문가다. 어렵다 여겨지는 현대미술과 미술시장을 쉽게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 ‘미미상인’을 운영하며, 서울대경영연구소가 발간하는 연례 영문저널 「KOREA ART MARKET」의 필진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청 무형유산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 한국예술경영학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대표저서로 『살아남은 그림들』(2020)이 있다.펀-쿨-섹시 도쿄 엿보기● 콘노 유키 미술비평가도쿄는 늘 상반되는 이미지가 있다. 세련된 동시에 오랜 전통이 있는 곳이다. 둘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센소지의 오랜 사찰을 방문하고 다이칸야마에서 쇼핑을 즐긴다. 돈키호테의 진열대 앞에서 망설이다가 고즈넉한 화과자집을 구경한다. 질서 있는 웨이팅 후에 시부야 사거리를 황급히 가로지른다. ‘펀(fun)’하고 ‘쿨(cool)’하고 ‘섹시(sexy)’함은 2019년 가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시 일본의 환경부 장관이였던 고이즈미 신지로(小泉 進次郎)가 발언한 내용 못지않게 일본의 중심지인 도쿄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즐거운 모습과 차분한 모습이 합쳐진 모습은 섹시하다는 인상을 강조한다. 섹시함은 내적으로도 충만한 상태가 표면에 감지되는 모습이다.이런 인상은 일본 열도 전체를 부동산 투기에 추진하게 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의 ‘열도개조론’ 정책(1972)의 시기와, 곧이어 찾아온 1980년대 거품 경제의 그림자가 여전히 길게 드리워진 것처럼 와닿는다. 야쿠자의 인생을 보낸 아버지의 뒤를 이은 여고생이 싸우는 아카가와 지로(赤川次郎)의 소설 『세일러복과 기관총』(1978)이 나온 1970년대 말부터, 롯폰기의 밤에 벌어진 사랑과 동반자살을 노래한 앤 루이스(Ann Lewis)의 ;(1984)이 나온 1980년대의 분위기는 도쿄라는 지역의 앞뒷면을 느슨히 이어주던 시대상과도 일치한다. 상반되는 듯한 어감이 결합할 때, 어쩌면 전복적 힘은 도쿄라는 도시가 갖고 있던 본연적 성질에 의한 것은 아닐까.전복은 ‘도시’가 갖고 있는 무미건조한 회색조의 인상을 그야말로 파고든 시선이다. 가수 보로(BORO)는 ;(1976)은 말 그대로 도쿄를 사막처럼 살벌한 곳으로 보았다. 회색조의 사막에서 우리가 헤맬 수밖에 없다면, 그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반복되는 무미건조함을 깨는 시선으로 미술가는 도쿄를 살펴본다. 1920년대에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가 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성립되는 - 뒷막으로 사라지는 범죄를 주제로 쓴 추리소설이 당시 지역 기반 커뮤니티가 사라진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하듯이 말이다.일찍이 소설가 아베 코보(安部公房)는 ‘엿보기’를 도시의 삶과 연관시켜서 이해했다. 욕심과 강한 두려움이 뒤섞인 이 행위는 인간관계에서 콘크리트로 뒤덮여 포장된 안정성·안전성을 전복하는 힘이 있다. 1978년에 진행한 아베 코보의 인터뷰에 앞서, 1946년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패전 직후의 죽은 기운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시와 잿빛으로 덮인 도시를 이겨내는 힘이 도쿄에서 묘사되었다. 도시를 무대로 공연을 올린 키사라기 코하루(如月小春)가 『도시로 노는 법(都市の遊び方)』(1986)에서 언급하듯이, 단조로움으로 뒤덮인 세상을 엿보는 것부터 시작하고 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한다.흥미롭게도 ‘펀-쿨-섹시함’의 환경개선 주장은 실험 정신을 보였던 미술가가 주변 ‘환경’을 일시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구현되었다. 예를 들어, 1951년에 출발한 짓켄코보(실험공방)는 시인 다키구치 슈조(瀧口修造)를 중심으로 음악가와 안무가들이 협업해 하나의 무대를 올렸다. 당시로서 실험적인 시도는 왜 하필 가능했을까. 서양 미술의 흐름을 CIE 도서관(SCAP CIE Information Center)에서 접하고, ;(니혼바시 타카시마야, 1951)을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한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일본의 전후는 문화적 자극을 많이 받고 있었다. 짓켄코보의 활동에도 거론된 ‘환경’이란 어쩌면 수행성이 강한 상호 관계로 장소와 인간, 신체와 작품 사이를 오가는 것이었다.그것은 생태주의적 시선보다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부재나 상실에 기반하여 태동한 움직임이었다. 여기서 환경은 기존의 미술 형식의 분류를 깨는 데 일조하는 것은 물론, 주변에 반응하고 상호작용을 도입한 시도의 무대가 되었다. 1970년에 열리는 ‘오사카 엑스포’에서 집대성되었지만, 짓켄코보가 활동을 보이던 시기에 도쿄에서 추구된 ‘환경’이란 도시의 이면에서 펀하고 쿨하고 섹시함을 끄집어 내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조명과 기계 장치, 사운드를 구사해 만든 일종의 무대는 도시의 단조로움을 깨는 20대 청년 작가들의 집단 예술이었다. 그렇게 봤을 때, 펀-쿨-섹시함은 최근에 나온 유행어나 관광객 관점에서 바라본 도쿄의 모습에 그치지 않고 이 도시에 뿌리박혀 있던 역사를 들추어 낸 것이다.도쿄에서 예술가들이 실험하는 장을 마련한 역할은 『요미우리』 신문의 앙데팡당전에서 출발한다. 1949년부터 시작한 이 행사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비롯한 해외 작가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수도권의 젊은 작가와 ‘규슈파’를 비롯한 지역 작가들이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보이는 기회가 되었다. 요컨대 아방가르드를 제도적인 틀 안에서도 허용하는 시대적 분위기였다. 다키구치 슈조가 요미우리 앙데팡당 운영에 관여했던 경험은 짓켄코보를 구성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앙데팡당의 한계에 부닥친 결과였다. 다년간 열린 앙데팡당전은 점차 표현이 과격해졌다. 실현 가능성이 적은 설치 방식, 누드 및 성적 표현, 전시 공간 내 오염 등의 이유로 반려되는 경우가 점점 생겼다. 그중에도 유명한 것은 ‘천엔권 지폐 재판’으로 알려진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瀬川原平)의 작품이다.후에 ‘하이 레드 센터’의 멤버로 활동하고 2023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초예술 토머슨』과 『노상관찰학입문』을 쓴 그는 1963년에 출품한 작품 ;이 위조지폐 혐의로 판정되어 재판까지 가게 된다. 그 외에도 고조된 실험과 작품의 도발성은 결국 앙데팡당의 존속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요미우리』 사장의 통보로 앙데팡당의 역사는 끝이 난다. 1960년에 일본을 방문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기호의 제국(L’empire des signes)』(1970)에서 파친코를 돌리는 사람을 보고 서예의 손재주에 빗대어 말한 ‘규제된 우발성’이 당시 예술가들에게 필요했을지도 모른다.시기는 1960년대. 전쟁 특수(특별수요)와 더불어 ‘도쿄 올림픽’(1964)과 ‘오사카 엑스포’(1970)가 잇따라 개최되었다. 공교롭게도 올림픽은 2021년(팬데믹으로 1년 연기되었다), 엑스포는 2025년에 도쿄와 오사카에서 각각 다시 개최하게 되었다. 당시의 열기를 똑같이 재현하긴 힘들겠지만, 그 시기를 떠올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관중에 있었을 것이다. 요미우리 앙데팡당 이후에도 예술가들의 실험 정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화가로 활동한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郎)는 1954년에 『오늘의 예술: 시대를 창조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발표하고, 같은 해 비평가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淸輝)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 에세이를 엮어 『아방가르드 예술』을 발표하였다.특히 오카모토의 책은 시대를 창조한다는 거대한 사명감이 예술가에게 짊어진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오늘의 예술』의 해설에서 그 당시 신진작가나 작가 지망생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썼을 정도로 오카모토의 영향은 컸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토대는 어떠한가’라는 소제목이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데, 여기서 오카모토는 예술과 기예를 다르게 생각하며, 전자를 훈련이나 숙련 없이 정신적으로 이루어 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을 대조하면서 그는 시대를 타개하는 힘을 전자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을 계승한 결과가 아카세가와는 ‘천엔권 지폐 재판’ 그리고 하이 레드 센터 활동에도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하이 레드 센터는 세 명의 한자 이름 첫 글자를 따와 지은 이름이다. 타카마츠 지로(高松次郎)의 하이(高),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레드(赤) 그리고 나카니시 나츠유키(中西夏之)의 센터(中). 팝적인 어감과 빨간색 느낌표를 심볼로 하는 이들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대부분의 무대는 도시 공간이었다. 도쿄의 중심을 도는 순환선 ‘야마노테센’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1964)은 일회성 퍼포먼스로 웨스턴돔 입주청소 도시 공간에 예술가가 개입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하이 레드 센터 이외에도 실험적인 예술가 그룹이 등장하는데, 이 중에는 보다 정치적 주장을 강렬하게 펼치는 그룹도 있었다.예를 들어, ‘네오 다다이즘 오거나이저스’(1960)는 적극적인 반예술을 추구했고, ‘제로지겐(제로 차원)’(1960-1970년대 초)은 1970년의 ‘오사카 엑스포’와 나리타국제공항 설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벌거벗은 퍼포먼스로 강력히 주장했다. 1960년대는 일본의 국가 성장과 국내의 갈등이 빚어지던 때였다. 안보 투쟁(1959-1960),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1965년경), 전학공투회(1968-1970)가 잇따른 시대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은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을 달리했다. 사회와 환경을 갖추게 하는 - 디자인하는 일에서 하나는 정치적 투쟁을, 다른 하나는 엑스포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만나게 된다. 후자는 전후 일본의 건축을 건축물이라는 단위에서 도시 계획으로 확장한 ‘메타볼리즘 건축 운동’(1960)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이야기가 또 다른 지역(오사카)으로 흘러가 버리니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1970년에 개최한 ‘도쿄 비엔날레 ’70(제10회 일본국제미술전)’은 미술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祐介)가 큐레이터로 참여해 ‘인간과 물질’이라는 주제로 국내외 작가를 소개했다. 1960년대 말에 풍기던 정치적 투쟁과 반예술의 경향과 달리, 나카하라는 모노하(もの派),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그리고 개념미술의 작품을 소개했다. 사회적 발언을 조성하는 장을 ‘만들고자’ 한 인위성과 대척점에서 모노하는 원재료의 배치나 설치를 통해서 작품을 선보였다. 시기적으로 겹치는 활동을 보였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표출하는 아방가르드가 아닌, 또 다른 아방가르드가 이 시기에 있던 것이다.‘도쿄 비엔날레 ’70’으로 돌아오자면, 이 전시에서 사진 매체를 다루는 작품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1970년 도쿄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특징 중의 하나로 기록 매체를 들 수 있다. ‘ANZAÏ 포토 아카이브’의 안자이 시게오(安齊重男)는 1970년부터 예술가들의 행사나 작품,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정리해 왔다. 마찬가지로 ;(1969)가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관찰자 시점은 ‘반예술’이 된 현실을 ‘초예술’로 전환하는 가능성을 내포하며, 그것은 세기말의 한 사건 이후부터는 보이지 않고 매몰된 역사나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되었다.도쿄라는 도시는 중앙이 비어 있다. 천황이 사는 ‘황거’는 더 이상 효력은 없고 빈 상징처럼 남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비어 있었지만 권위로 채운 건지도 모른다. 1980년대의 세계화와 거품 경제의 부침을 겪은 후 일어난 사건이 1995년의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테러였다. 비가시적인 무기인 가스는 황거의 상징성 못지않게 파장을 만든다. 지금 보이지 않음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 연결되어 있다. 도쿄의 모습이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다면, 이 표면 밑에서 움직이는 힘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작가들이었다. 2000년대 활동하는 작가들은 역사와 사회의 그늘진 부분에서 도쿄를 받치는 힘을 꺼낸다.아이다 마코토(会田誠)가 도쿄를 ‘잡초’로 본 시선이 집대성한 ;(2021-). 도쿄를 들여다보는 예술가의 시선은 동시대에 떠오르지 않는 까끌까끌한 부분을 드러나게 해 준다. 거기에 우리가 알던 ‘진짜’ 도쿄가 숨어 있지 않을까. PA글쓴이 콘노 유키는 한국과 일본에서 미술 전시를 보고 글을 쓴다. ;(시청각 랩, 2025) 등의 전시를 기획했고 그 외 많은 전시에 기획 협력, 공동 기획으로 참여했다. ‘GRAVITY EFFECT 2019’ 비평 공모에서 2위를 수상했다.상하이, 추상이 살아남은 도시: 결란사에서 딩이까지, 형식의 자유가 머문 항구● 조혜정 ‘2026 창원조각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딩이(丁乙)의 작업실은 상하이 안에서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다. 도시가 팽창하고 오래된 공간들이 철거와 재개발로 밀려날 때마다 주소와 창밖 풍경도 달라졌다. 그 궤적에는 한 작가의 작업실 이동사와 상하이의 도시 재편, 동시대 미술 지형의 변화가 겹쳐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작업의 거점을 상하이 밖으로 옮기지 않았다. 변하는 도시와 함께 이동하면서도 이곳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점에서 딩이는 누구보다 상하이다운 작가다. 오늘날 상하이를 대표하는 예술가 한 사람을 떠올린다면, 나에게는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딩이는 1988년부터 ‘十’와 그 변형인 ‘×’를 반복하는 ‘십시(十示, Appearance of Crosses)’ 연작을 이어왔다. 그의 화면을 보고 있으면 상하이의 밤이 떠오른다. 빌딩의 창과 도로, 자동차 불빛과 전광판의 픽셀이 거대한 격자를 이루는 시간. 멀리서는 정교한 질서 같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충돌과 흔들림, 예측할 수 없는 속도가 드러난다. 그는 풍경을 직접 그리지 않으면서도 이 도시가 변화하는 방식을 오래 그려왔다.내가 중국 동시대 미술에 주목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국내에서 중국미술은 대체로 두 개의 이미지로 소비됐다. 한쪽에는 무표정한 가족과 과장되게 웃는 남자들,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 같은 커다란 얼굴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차이니즈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으로 묶인 정치적 저항과 전위성의 서사가 있었다. 정치팝과 냉소적 사실주의는 중국 동시대 미술의 얼굴이 되었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는 색과 선, 화면의 구조로 시대와 관계 맺어온 또 다른 미술을 가리기도 했다.중국미술을 들여다본 지 20년, 그중 10년을 중국에서 살며 여러 도시의 미술 현장과 작가들의 작업실을 오갔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발견한 것은 강렬한 정치적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오래되고 끈질긴 모더니즘의 계보였다. 직접적인 정치적 상징 없이도 색과 선, 화면의 구조로 시대와 관계 맺어온 미술. 그 중심에 상하이가 있었다. 형식의 자유가 일찍 조직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단절 속에서도 거듭 살아난 중요한 원점 가운데 하나였다.모던 상하이, 형식이 자유를 얻다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진 뒤 상하이는 한국인에게 주말 여행지가 됐다.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우캉루와 안푸루, 옛 프랑스 조계지는 낭만적인 산책길로 소비되지만 외국 문물의 창구이자 중국의 주권이 분절된 공간이었다. 상하이의 모더니티는 처음부터 개방과 침탈, 자유와 불평등이 뒤엉킨 채 도착했다. 영화 ;(2007)가 포착한 것은 전쟁과 점령의 그림자가 짙어진 1940년대 상하이다. 그보다 앞선 1930년대 초, 프랑스와 일본에서 새로운 미술을 접한 팡쉰친(龐薰琹)과 니이더(倪貽德) 등은 순수예술과 형식의 자율성을 내건 결란사(決瀾社)를 조직했다.개항 이후 해외 서적과 복제 이미지가 들어오고 출판과 영화, 광고와 상업디자인이 새로운 시각 환경을 만들었다. 서구 미술은 잡지와 포스터, 쇼윈도와 간판을 통해 도시의 일상 속으로 번역됐다. 20세기 초 크게 유행한 월분패(月份牌)는 달력과 광고, 전통적 미인도와 상품 이미지, 중국식 선묘와 서양식 명암을 한 화면에 결합했다. 잡지 삽화와 영화 포스터, 연환화가 대량 유통되면서 사람들의 눈은 미술관보다 거리와 인쇄물 속에서 먼저 근대화됐다.결란사는 바로 이러한 시각적 토양 위에서 등장했다. 1931년 결성된 이들은 1932년 첫 전시와 선언을 통해 회화를 자연의 모방이나 교훈의 도구가 아니라 색채와 선, 형태가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순수한 추상미술단체는 아니었지만 형식의 자율성을 집단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추상이 출현할 조건을 열었다. 결란사는 상하이 추상의 첫 장이라기보다 그 첫 장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전사(前史)에 가깝다.발전이 아니라 생존의 역사중국에서 추상미술이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것은 전통미술에 비재현적 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인화는 대상의 외형보다 필묵의 기운과 여백을 중시했고, 서예의 선은 문자의 의미를 넘어 속도와 압력, 호흡의 흔적을 드러냈다. 대상을 닮게 재현하기보다 선과 여백, 기운과 리듬을 중시하는 추상적 감각은 중국의 오랜 조형 전통 속에 이미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제는 20세기의 역사였다. 침략과 전쟁, 내전을 거치며 미술에는 개인의 감각보다 민중을 계몽하고 국가를 구하는 역할이 요구됐다.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미술의 공식 노선으로 자리 잡자, 미술은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했고 무엇을 말하는지도 분명해야 했다. 의미가 열려 있는 추상은 부르주아적 형식주의로 배척됐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중국 추상미술은 하나의 양식이 다음 양식으로 자연스럽게 계승된 역사가 아니었다. 여러 차례 시작과 중단을 거듭했고, 개인의 작업실로 숨어들거나 국경을 건너 다른 모습으로 이어졌다. 중국 추상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라기보다 생존의 역사에 가까웠다.상하이는 항구였고, 항저우는 학교였다상하이 추상의 계보는 인접한 항저우와 함께 보아야 한다. 상하이가 외부의 사상과 이미지가 드나들고 작가들이 세계로 나아가는 항구였다면, 항저우 국립예술원은 이를 교육과 창작의 언어로 번역한 학교였다. 린펑몐(林風眠)은 쉬베이홍(徐悲鴻)과 함께 중국 근대미술을 연 초기 프랑스 유학생 세대였다. 쉬베이홍이 정확한 소묘와 사실주의로 시대와 민족의 현실을 담고자 했다면, 린펑몐은 색채와 화면 구성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감각하는 길을 택했다.정방형 화면과 평면화된 공간, 응축된 색면으로 전통회화와 서구 모더니즘 어느 한쪽에도 환원되지 않는 문법을 만들었고, 항저우에서 교육의 기반을 세운 뒤 상하이에서 자신의 회화 언어를 더욱 밀어붙였다. 우다위(吳大羽)는 추상으로 더 직접 나아간 선구자였다. 항저우에서 자오우키(趙無極)와 주더췬(朱德群), 우관중(吳冠中) 등 다음 세대를 가르쳤고, 이후 상하이에 머물며 색채와 빛, 운동과 리듬 자체를 회화의 내용으로 삼았다. 결란사가 선언했던 형식의 자유는 항저우의 교실과 상하이의 작업실을 오가며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상하이에서 파리로, 추상의 항로중국 모더니즘의 한 흐름은 상하이에 남았고, 다른 흐름은 이 도시를 떠나 세계로 향했다. 자오우키는 항저우에서 수학한 뒤 1947년 상하이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듬해 라란(Lalan)으로 더 잘 알려진 셰징란(謝景蘭)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서예의 필선과 중국 산수의 공간감을 어느 한 문화에도 귀속되지 않는 회화로 확장했다. 상하이에서 음악을 공부한 라란은 파리에서 회화와 음악, 춤을 결합한 독자적인 작업을 펼쳤지만, 오랫동안 ‘자오우키의 첫 아내’로 더 많이 기억됐다.이 대목에서 나는 김기창의 이름 뒤에 가려졌던 박래현을 떠올린다. 박래현이 자신의 작품으로 다시 읽히고 있듯, 라란 역시 뒤늦게 독립적인 작가로 재평가되고 있다. 2024년 크리스티(Christie’s) 홍콩에서 ;가 2,336만 5,000홍콩달러, 당시 한화 약 40억 원에 낙찰되며 작가의 세계 경매 최고가를 새로 썼다. 상하이는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입구이자 중국의 감각을 세계로 내보내는 출구였다. 이 도시의 국제성은 받아들인 것을 자기 언어로 바꾸어 다시 내보내는 힘에 있었다.잠복했던 추상, 다시 표면으로개혁개방 이후 상하이에서는 제도 밖에서 이어지던 추상 실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상하이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이 도시에서 가르치고 작업한 위여우한(余友涵)은 ‘원’ 연작에서 점과 선의 흐름으로 도가적 순환과 우주의 운동을 그렸다. 같은 상하이 출신의 치우더수(仇德樹)는 1979년 실험미술단체 차오차오서(草草社)를 공동 창립하고, 종이를 찢고 다시 잇는 ;을 통해 파괴와 봉합이 공존하는 화면을 만들었다.위여우한의 반복되는 점과 원, 치우더수의 찢고 잇는 행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급변하는 현실을 감각했다. 이들의 추상은 현실을 외면한 도피가 아니라 직접적인 정치적 도상 없이도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었다. 1980년대 중국 전위미술이 베이징에서 선언과 행위, 정치적 충돌의 장면으로 부각됐다면, 상하이의 추상은 도시의 시각문화와 일상의 질서 속에서 상대적으로 조용히 축적됐다. 디자인과 인쇄, 공업도시의 반복과 속도는 회화의 구조와 리듬으로 번역됐고, 바로 그 흐름 위에서 딩이가 등장했다.상하이를 웨스턴돔 입주청소 재현하지 않고, 리듬을 그리는 작가딩이의 ‘+’와 ‘×’는 젊은 시절 장식디자인을 공부하고 인쇄소와 공장에서 일하며 접한 재단선과 색 맞춤용 교정표식에서 출발했다. 월분패와 잡지, 광고와 연환화가 도시의 눈을 훈련해 온 상하이에서, 중국 현대 추상을 대표하는 가장 지속적인 기호 가운데 하나가 순수회화가 아니라 산업 인쇄의 표식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를 직접적인 계보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하이의 추상이 거리와 산업, 인쇄와 디자인에서 분리된 형식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딩이가 십자를 택한 것은 특별한 의미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고정된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한꺼번에 밀려들던 1980년대 중국에서 그는 특정 문화나 이데올로기에 쉽게 귀속되지 않는 최소한의 기호를 선택했다. 초기 화면은 인쇄 교정표처럼 치밀했고, 자와 테이프로 손의 흔적과 즉흥성을 억제했다. 그러나 의미를 비워낸 십자는 역설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가장 넓은 그릇이 됐다.1990년대 말부터 형광색의 ‘+’와 ‘×’가 화면 안에서 증식하며 전광판과 도로망, 고층 건물의 불빛이 교차하는 상하이의 야경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딩이는 도시의 풍경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것은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 곧 질서와 속도, 생산과 소비, 빛과 정보가 밀려들며 만들어 내는 밀도와 리듬이다. 내가 딩이의 작업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이렇다. 그의 회화는 형식적으로는 추상이지만,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현실주의적이다.화면에는 사건도 인물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 구조와 색채는 동시대 중국이 경험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속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는 현실의 외형이 아니라 그것이 작동하는 질서를 포착했다. 그의 작업은 형식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형식적 추상의 내부에서 현실을 감각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갱신해 온 과정에 가깝다.상하이가 팽창하고 도시의 풍경과 리듬이 달라지는 동안 딩이의 시선도 함께 변했다. 초기에는 기호의 질서를 정면에서 응시했고, 이후에는 고층 도시를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의 시선이 화면에 더해졌다. 2010년대 이후에는 도시를 넘어 산과 하늘, 별자리와 우주의 질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목판을 파고 새기면서 십자는 화면 위의 이미지인 동시에 물질에 각인된 흔적이 됐다.2025년 쿤밍 개인전 ;에 주목했다. 도시의 정보 코드처럼 보이던 십자는 고대의 별자리와 영혼의 여정을 잇는 표식으로 확장됐다. 이는 서구 추상에서 동양 전통으로 되돌아간 회귀가 아니라, 모더니즘과 지역의 오래된 지식체계를 함께 통과하며 자신의 언어를 다시 묻는 일이었다.그가 40년 가까이 하나의 기호를 반복하면서도 같은 그림을 되풀이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호는 같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은 계속 달라졌다. 그는 상하이에 머물면서도 이 도시를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상하이는 소재가 아니라 시점이었다. 최근 천문과 신화로 확장된 그의 시선은 올가을 한국에서 조각의 형식을 얻는다. ‘2026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신작 ;에서 그는 조선의 천문도와 동아시아의 이십팔수 체계를 참조해 ‘십시(十示)’를 비석 위에 새긴다. 별자리와 ‘십시’가 검은 돌 위에서 교차하고, 그 표면에는 실제 하늘과 구름이 비친다. 상하이의 인쇄 교정표에서 출발한 십자 기호가 동아시아의 밤하늘을 거쳐 돌에 새겨지는 것이다. 상하이는 여전히 관문인가중국 추상미술의 역사는 매끄러운 직선이 아니었다. 결란사가 요구한 형식의 자유는 전쟁과 정치 속에서 중단됐고, 개인의 작업실과 교육 현장, 국경을 건넌 작가들의 삶을 통해 다른 모습으로 이어졌다. 항저우가 그 언어를 가르친 학교였다면, 상하이는 그것이 시험되고 변형되며 세계로 나아간 항구였다. 이 역사에서 상하이는 하나의 화파를 생산한 도시라기보다 서로 다른 문화와 감각이 드나드는 관문에 가까웠다. 상하이 추상미술의 역사는 국가와 시대가 요구한 ‘보이는 현실’에 맞서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감각해 온 역사다. 추상은 현실을 피하는 침묵이 아니라, 그 표면 아래의 질서와 감정을 읽는 또 하나의 언어였다.딩이는 과거의 계보를 잇는 후계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상하이의 추상이 지금도 변화하며 세계와 접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재형의 작가다. 한 도시에 남는다는 것은 같은 자리를 고수하는 일이 아니라, 변화하는 도시와 함께 시점을 바꾸면서도 관계를 끊지 않는 일이다. 딩이는 그렇게 상하이와 함께 변해 왔다. 의미를 지우기 위해 선택했던 그의 십자는 도시의 격자와 네온을 지나 별자리와 신화, 돌과 땅까지 품게 됐다. 그 기호가 도시와 국경, 서로 다른 시간의 지층을 가로지르는 한, 상하이는 여전히 관문이다. PA글쓴이 조혜정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미술 연구와 교육, 전시기획과 비평을 이어오고 있다. 국민대학교에서 입체미술을 전공하고, 중앙미술학원(CAFA)에서 미술사 석사, 칭화대학교(Tsinghua University) 미술대학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현대미술과 한국 근현대미술, 공공미술과 조각사를 중심으로 연구해 왔으며, 국제갤러리 어소시에이트 디렉터와 이랜드문화재단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2026 창원조각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을 맡고 있으며, 성신여자대학교 조소과 초빙교수와 상하이대학교(SHU) 국제공공예술연구소 특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홍콩의 물때● 이나연 미술평론가1990년대 초반, 베이징의 어느 작업실. 장샤오강(Zhang Xiaogang)이 자기 그림값을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결국 큰 캔버스 한 점에 500달러(한화 약 74만 원)를 부른다. 훗날 경매에서 한 점에 100억 원대를 호가하게 될 작가의 셈법치고는 순진하다. 흥정의 상대는 홍콩에서 온 화상 장송런(Johnson Chang)1)이었다. 시장이 아직 존재하지 않던 중국 현대미술에 처음으로 가격표를 달아 준 사람이 홍콩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역할을 요약한다. 홍콩은 만들기보다 통과시키는 데 능했다. 언제나 항구였고, 항구의 물은 하루 두 번 들고 난다.홍콩에 처음 간 것도 3월이었다. 3월의 홍콩은 미술계의 설날 같아서, 전 세계의 딜러와 컬렉터와 평론가들이 이 습한 도시로 일제히 몰려든다. 완차이의 홍콩 컨벤션 전시 센터(HKCEC)에서 페어를 보다가 저녁이면 센트럴로 넘어가 오프닝을 돌고, 밤에는 누군가의 디너에 끼어 앉는 일주일. 뉴욕에서 배운 공짜 와인의 법칙은 홍콩에서도 유효했는데,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 도시에서 와인은 층수를 타고 올라간다. 미술이 수평으로 퍼지는 뉴욕과 달리 홍콩의 미술은 수직으로 쌓인다. 임대료가 평면을 허락하지 않는 도시의 생존법이다.첫 방문의 기억은 지리 감각으로 남아 있다. 공항버스가 칭마대교를 건널 때 창밖에 컨테이너선들이 장난감처럼 떠 있었고, 호텔에 짐을 던지고 나온 밤거리에서 바다와 디젤과 국수 삶는 김이 섞인 덥고 무거운 공기를 처음 맡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이 이 도시에서 미술이 거래되는 공기이기도 하다는 것을.항구의 셈법지리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홍콩섬과 주룽(九龍)반도 사이에 빅토리아 하버가 있다. 스타페리로 8분이면 건너는 이 좁은 바다가 도시의 심장이다. 섬 쪽 해안의 센트럴은 은행과 로펌의 동네이고, 그 등 뒤로 곧장 급경사가 시작되어 미드레벨의 아파트 숲으로 이어진다. 평지가 귀해 길은 산을 타고 오르고 건물은 하늘로 솟는다.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가 출근길 언덕을 실어 나르고, 100년 된 2층 트램이 해안선을 따라 덜컹거린다. 정상의 피크에서 내려다보면 은행 타워와 아파트가 해안선까지 빽빽이 들어차, 이 도시에 빈 벽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해진다. 미술도 이 지형을 따라 움직였다.시작은 경매였다. 1973년 소더비(Sotheby’s)의 줄리언 톰프슨(Julian Thompson)이 홍콩에서 첫 경매를 열었다. 주식시장이 폭락한 해였는데도 경매장은 붐볐다고 한다. 짐작해 보자면 이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1949년을 전후해 상하이에서 내려온 노(老)컬렉터들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청화백자를 돌려 보고, 광둥어와 상하이 말과 영국식 영어가 한 방에서 섞인다. 전쟁과 혁명을 피하며 가장 좋은 것들만 트렁크에 넣어 온 사람들에게, 경매장은 시장이기 이전에 두고 온 세계를 다시 만나는 응접실이었을 것이다.초기 경매에 도자기 수백 점을 내놓은 컬렉터 로버트 창(Robert Chang)에게는 지금도 소더비의 1번 패들이 예약되어 있다고 한다. 1986년에는 크리스티(Christie’s)가 뒤따랐다. 관세도 판매세도 없는 자유항, 영어가 통하는 법치의 도시 그리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후지. 물건과 돈이 통과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드물었다. 홍콩 미술시장이 화랑과 작업실이 아니라 경매장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50년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창작보다 유통이 먼저 온 도시. 그 순서를 두고 오랜 빈정거림이 있었지만, 늦게 온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500달러의 미술사항구에도 안목은 있었다. 1983년 장송런이 한아트 TZ 갤러리를 열었고, 1993년 초 완차이의 홍콩아트센터에서 베이징의 평론가 리셴팅(Li Xianting)과 함께 ;(2001)은 1억 8,000만 홍콩달러(한화 약 340억 원)에 낙찰되며 아시아 동시대 미술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다.미술관이 해주지 않는 일은 작가들이 직접 했다. 1986년 비디오타지(Video tage)가 비디오아트를 시작했고, 1996년에는 작가들이 자력으로 비영리 공간 파라 사이트(Para Site)를 열었다. 2000년 장송런과 클레어 수(Claire Hsu)가 세운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는 골동품 가게와 관 짜는 목공소가 늘어선 할리우드 로드의 상가 건물에서 아시아 미술의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향 연기와 골동 냄새가 밴 언덕길을 올라 아카이브의 서가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이 도시가 유통만 하는 곳이 아니라 기억도 하는 곳임을 알게 된다.페더 빌딩의 엘리베이터1997년 중국 반환을 앞두고는 자본도 미술도 끝나리라는 예측이 무성했다. 결과는 반대였다. 본토의 새 부자들이 남하했고, 홍콩은 중국 미술이 세계로 나가는 문이자 세계의 미술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문이 되었다. 문은 양쪽으로 열릴 때 가장 바쁘다. 판이 결정적으로 커진 것은 2008년이다. 리만 브라더스(Lehman Brothers)가 무너지던 해에 매그너스 렌프루(Magnus Renfrew)가 ‘아트 홍콩(ART HK)’이라는 페어를 시작했고, 이 겁 없는 페어는 2013년 ‘아트 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2)이 되었다. 첫 회의 저녁을 상상해 본다. 하버 쪽으로 새 부리처럼 돌출한 컨벤션 센터, 에스컬레이터를 가득 메운 인파, 통역을 대동하고 부스 사이를 성큼성큼 걷는 본토의 컬렉터들. 유리벽 너머로는 화물선이 지나간다. 이 페어는 그 뒤로 매년 3월, 아시아 미술계의 시계를 맞추는 표준시가 되었다.웨스턴 메가 갤러리들이 상륙한 것도 이 무렵이다. 2011년 가고시안(Gagosian)이 페더 빌딩(Pedder Building)3)에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전시를 걸고 문을 열었다. 1층에는 미국 의류 매장이 있고 위층으로 갤러리들이 켜켜이 포개진 건물. 한아트도 같은 건물에 있었으니, 중국 아방가르드를 발굴한 화상과 뉴욕의 제국이 한 엘리베이터를 나눠 쓴 셈이다. 오프닝이 겹치는 날이면 낡고 느린 엘리베이터 앞으로 줄이 아케이드까지 늘어섰다. 기다림의 길이가 그날 전시의 화제성에 비례한다는 것을 그 줄에서 배웠다. 2018년에는 아예 갤러리를 위해 설계된 수직 타워 H 퀸스(H Queen’s)가 들어서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하우저 앤 워스(Hauser &Wirth),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가 층층이 입주했다. 첼시의 갤러리 지구를 세로로 세워 엘리베이터로 꿴 셈이다.매립지 위의 미술관시장은 넘치는데 미술관이 없다는 것이 홍콩의 오랜 콤플렉스였다. 대답은 바다를 메워서 왔다. 주룽 쪽 매립지 사십 헥타르에 서구룡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웨스턴돔 입주청소 District, West K)가 조성되었고, 2021년 11월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de Meuron)이 설계한 M+4)가 문을 열었다.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크(Uli Sigg)가 기증한 1,500점 가까운 중국 현대미술이 컬렉션의 뼈대가 되었다. 팬데믹으로 국경이 닫혀 외국의 미술계 인사는 아무도 오지 못한 개관이었지만, 매표소 앞의 긴 줄은 온전히 홍콩 사람들의 것이었다. 거대한 LED 파사드는 밤마다 바다 건너 센트럴의 스카이라인을 마주 보고 빛난다. 앞서 2018년에는 센트럴의 옛 경찰서와 감옥 단지가 타이쿤(Tai Kwun)5)이라는 예술 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죄수를 가두던 담장 안에서 동시대 미술이 전시되고, 옛 유치장 마당에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신다.임대료를 피해 작가들은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신제(新界) 포탄(Fo Tan)의 공장 건물에 깃든 작업실들, 토과완의 옛 소 검역소를 개조한 아티스트 빌리지 그리고 2016년 지하철이 뚫리며 갤러리 지구가 된 섬 남쪽의 물류창고 동네 웡척항(Wong Chuk Hang)6). 기름때 묻은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문이 열리는 순간 흰 벽과 찬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고, 창밖으로는 애버딘의 정박장이 내려다보인다. 어느 도시에서든 미술은 산업이 비워 준 자리에 세 들어 살지만, 이만한 낙차는 홍콩만의 것이다. 그 사이 로컬 작가들의 이름도 만들어졌다. 리킷(Lee Kit)과 삼손 영(Samson Young)이 ‘베니스 비엔날레’ 홍콩 파빌리온에 나갔고, 도시의 기억을 목판에 겹쳐 그리는 람퉁팡(Lam Tung Pang)의 작품은 이제 ‘아트 바젤’ 첫날에 팔린다. 시장의 도시가 뒤늦게 자기 작가들을 발견하는 중이다.검은 옷의 여름물론 이 상승 곡선 사이에 써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2019년 여름 컨벤션 전시 센터 앞 하코트 로드를 검은 옷의 시위대가 메웠고, 이듬해 국가보안법이 시행되었다. M+는 개관하면서 아이 웨이웨이(Ai Weiwei)가 천안문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든 사진을 걸지 못했다. 떠나는 작가와 기획자들이 있었다. 홍콩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던 친구 부부도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국경 봉쇄가 3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서울과 싱가포르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2022년 ‘프리즈(Frieze)’가 아시아 거점으로 서울을 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한 시대의 끝을 점쳤고, 2024년 봄 홍콩 3대 경매사의 이브닝 세일 총액은 전년 대비 40% 가까이 빠졌다. 무엇을 전시할 수 있는지, 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르는 채 각자의 짐작으로 일하는 시절이 온 것이다. 시장은 원래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지만, 생각해 보면 이 도시의 시장은 불확실성 속에서 태어나 자란 시장이기도 했다.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썰물을 이야기하던 바로 그 시기에 경매회사들은 홍콩에 가장 큰 베팅을 걸었다. 2023년 필립스(Phillips)가 M+와 마당을 마주한 서구룡 신사옥으로 이전했고, 2024년 소더비는 센트럴 랜드마크 차터 1층에 ‘메종’을 열어 경매를 아예 거리로 끌어내렸으며, 같은 해 크리스티는 자하 하디드(Zaha Hadid) 사무소가 설계한 곡면 유리 타워 더 헨더슨에 아시아 본부를 차렸다. 개관 경매에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모네(Claude Monet)가 나왔다. 시장이 꺾인 시점에 세 회사가 나란히 수만 제곱피트의 임대차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다. 사업가다운 배짱인지, 항구의 물때를 읽는 오래된 감각인지. 지난봄 랜드마크 차터 앞을 지나다 유리 벽 안을 들여다봤다. 명품 매장들 사이에서 관광객들이 쇼핑백을 든 채 진열된 그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반세기 전 상하이 컬렉터들의 응접실이었던 경매장이 이제 거리의 쇼윈도가 된 것이다.밀물은 다시물은 실제로 돌아오는 중인 듯하다. 올해 3월의 ‘아트 바젤 홍콩’에는 240개 갤러리가 참가했고 역대 최다인 9만여 명이 다녀갔다. 첫날에만 피카소(Pablo Picasso)가 400만 달러(한화 약 59억 원)에, 류예(Liu Ye)가 380만 달러(한화 약 56억 원)에 팔렸고, 갤러리마다 처음 보는 젊은 아시아 컬렉터가 늘었다고 입을 모았다. 홍콩의 한 미술 자문가는 올해를 두고, 과거의 과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비로소 제 발로 서는 해라고 진단했다. 광풍이 아니라 물때라는 뜻일 테다.홍콩의 미술 지도는 여전히 좁고 가파르다. 완차이의 컨벤션 전시 센터에서 트램을 타면 15분 안에 페더 빌딩 앞에 내리고, 거기서 H 퀸스까지는 걸어서 5분, 타이쿤까지는 언덕을 10분 오르면 된다. 스타페리로 바다를 건너면 M+와 필립스가 마주 서 있다. 페어 기간의 어느 밤, 마지막 페리를 타고 주룽 쪽으로 건너간 적이 있다. 등 뒤로는 센트럴의 불빛이, 앞으로는 M+의 파사드가 물 위에서 흔들렸다. 맨해튼에서는 7년을 살고도 도시의 전모를 한 번에 본 적이 없는데, 홍콩은 배 한 척 위에서 자기 미술 지도를 통째로 보여준다.빅토리아 하버의 바람은 톰프슨이 첫 경매봉을 두드리던 1973년이나 지금이나 같은 냄새일 것이다. 소금기와 습기, 정박한 배의 기름 냄새에 이제 샴페인과 아크릴 물감 냄새가 조금 섞였을 뿐이다. 밀물과 썰물은 항구의 운명이고, 홍콩은 그 리듬을 반세기 동안 견뎌 왔다. 물이 빠질 때마다 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항구는 물이 나간 자리에서 다음 밀물을 준비하는 법을 안다. 3월이 오면 나는 또 그 습한 바람 속을 걸을 것이다. 갤러리 엘리베이터 앞의 긴 줄에 서서, 이 수직의 도시가 다음에는 무엇을 통과시킬지 지켜보면서. PA 글쓴이 이나연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후, 미국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에서 미술평론 석사학위를 받고 뉴욕에서 7년간 활동하며 현대미술 관련 저서를 다수 출간했다. 2017년 설립한 글로벌 예술 플랫폼 ‘씨위드’와 2019년 개관한 대안공간 새탕라움을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2020년부터 4년간 관장으로 제주도립미술관을 이끌었으며 출판예술을 주제로 서울대학교 미술경영과정 박사학위를 받았다.[각주]1) 장송런(張頌仁, Johnson Chang): 홍콩의 화상이자 큐레이터. 1983년 센트럴에 한아트 TZ 갤러리(Hanart TZ Gallery)를 설립해 중국 현대미술을 국제 무대에 소개한 선구자로, 2000년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를 공동 설립했다.2) '아트 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 2008년 출범한 ‘아트 홍콩(ART HK)’을 아트 바젤 측이 인수해 2013년 첫 회를 연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 매년 3월 완차이의 홍콩 컨벤션 전시 센터에서 열린다.3) 페더 빌딩(Pedder Building): 1923년 센트럴 페더 스트리트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상업 건물. 홍콩 도심에 남은 몇 안 되는 전전(戰前) 건축물로, 2010년대 이후 가고시안, 한아트 TZ 등이 입주하며 갤러리 명소가 되었다.4) M+: 서구룡 문화지구의 시각문화 미술관.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de Meuron) 설계로 2021년 11월 개관했으며, 미술·디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